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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경론에 대한 노트: 풍경을 위한 조각에 대하여


이한범
축경론 도록에 수록, 2020


핑크 비즈니스(Pink Business)는 현남과 음악가 민성식이 2014년 결성하여 2017년까지 활동을 이어간 밴드로, 일렉트로닉 기타를 베이스로 노이즈 사운드를 운용하는 앰비언트 음악을 연주한다. 2016년 제작된 그들의 유일한 앨범 〈Pemo〉에는 총 6개의 곡이 실려 있다. 기타 연주가 불러오는 서정성 이후 모종의 긴장이 고조된 채로 끝나는 세 번째 트랙 〈There’s a Storm in the East〉를 지나면, 길고 느린 리듬의 저음 킥 사운드가 그 긴장을 이어 받은 〈Landscape 1〉에서 노이즈가 기타 음계의 시퀀스를 뚫고새어 올라와 전면화 되기 시작하면서 이 앨범은 청취자를 다시 물질적 현실에 강하게 묶어 두려 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다음 트랙 〈Tetsuo〉의 강하고 빠른 비트와 폭이 두터운 진동의 노이즈 사운드에 저절로 눈이 감길 것이다. 〈Pemo〉의 청취의 서사 안에서 〈Landscape 1〉은 일종의 전이 작용을 위한 시간 구역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추상적 현실에서 구체적 공간으로의 되돌아옴을 위한 예비이자 압축되어 있던 전체를 다시 열어젖히기 위해 채비를 갖추는 길목이다. 그러면 청취자는 해변과 도시를 걷던 걸음1)을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나’를 둘러싼 공간 전체를 조망하게 된다. 풍경을 인식하게 되는 거리가 생기는 순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하나는 급격하게 증폭된 정보의 복잡성이고, 다른 하나는 길을 잃은 힘(정보를 조직하는 시퀀스)의 방향이다. 모두 노이즈의 개입과 증가에 뒤따르는 효과다. 여기서 〈Landscape 1〉의 제목이 지시하는 ‘풍경’과 노이즈의 관계에 관한 물음 하나가 떠오른다. 노이즈는 풍경의 인식에 관한 형식인가? ‘Landscape’ 뒤에 붙은 ‘1’이라는 숫자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여러 풍경 중 첫 번째, 혹은 여러 풍경 중 하나라고 독해된다면, 무엇보다도 핑크 비즈니스는 풍경을 일종의 유사현실(reality)로서 재생산하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보이게끔 조직되고 변환된 현실. 《축경론》에서 조각을 통해 풍경을 다룸으로써 세계를 구성하는 힘을 추적하고자 한 현남의 시도가, 그의 핑크 비즈니스 시절 음악 작업과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두 작업은 모두 실재(real)에 다가서기 위한 리얼리티의 형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노이즈를 그 형식으로 참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왜 노이즈는 형식이 되어야만 했을까?

조각의 풍경론


풍경이라는 실재는 우리가 지각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유동성의 총체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러한 것을 풍경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나’와 거리를 둔 객관적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즉 우리의 인식이 세계의 어떤 요소를 선별하고 유동성의 경로를 물질화하는 조직화를 수행하여 대상을 구성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풍경이라고 받아들인다. 때문에 풍경은 언제나 일종의 텍스트인 이미지다. 여기서 ‘구성’이란, 의미로의 환원을 넘어서는 범주로서 요소들의 경합이라는 관계의 양태를 일컫는다.2) 이러한 점에서 풍경은 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고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상태로, 혹은 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은 ‘나’라는 주체 없이는 불가능한 허구라 이해할 수 있다.3) 그렇다면 주체는 풍경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풍경은 세계를 압축하고 조직하는 인간적인 인식 작용으로서 경험의 반복과 누적을 통한 앎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발견하고 재생산하는 도구이자 쓰기의 소여이기도 하다. 주체는 이 힘겨루기의 상황에 놓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가 여기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는 풍경으로부터 어떤 거리를 가질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 간격은 인식의 뒷걸음질로 만들어질 것이다. 풍경의 의미와 아름다움으로부터 멀리 달아날수록, 또 눈길을 빼앗고 응시하게 만드는 개별 요소의 매혹을 이겨낼수록 우리는 순수한 경합의 상황만을 바라볼 수 있다. 달아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어떠한 ‘보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풍경은 자연스러운 듯 하지만 늘 어떠하게 ‘보이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감춘다. ‘보기’가 역사적인 힘의 축적이자 당대의 화용론이라면, 풍경은 우리를 구성하는 외부적 힘의 작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달아남은 결국 어떤 힘과 그 사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풍경이라 할 이미지란 그리하여 무엇을 보거나 보지 않는 정치,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의 윤리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나의 ‘보기’에 개입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보기를 넘어서서 다른 인식의 방법과 앎을 이끌어 내는 것이 그 정치와 윤리를 탐색하는 시퀀스를 구축한다. 이 시퀀스의 이음새는 인식 체계의 한계를 인식하고 실재와 유사현실 사이의 오차 사이를 사유하는 장소일 것이다. 그곳은 진실을 좇는 방법과 입장이 논쟁할 수밖에 없는 곳이기에, 여전히 동시대 예술의 한 영토이다.4)

현남의 《축경론》은 이와 같은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풍경의 생산과 재생산에 관한 역동에 기반하며, 인식에서의 달아남에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쓰기에 다다르는 절차의 유기적 연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전시는 표면적으로는 쓰기로서의 조각적 실험에 집중하지만5), 그것은 이미 주어져 널리 퍼진 이미지에 대한 의심과, 요소를 선별하고 조직하는 새로운 인식 행위 없이는 불가능하다. 《축경론》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쓰기의 순수한 형식이고 그것은 언제나 잊힌 무언가 이다. 관객은 눈앞에 놓인 사물에 다가서기 위해 마치 고고학자가 된 것처럼 여러 지층을 뚫고 가능한 깊은 곳까지 파 내려 가야하고, 또 가능한 멀리까지 배회하며 흩어진 증거들을 수집해 나가야 한다. 전시장에서 우리는 경관을 감상하듯 우뚝 솟은 좌대 위의 조각들 사이를 거닐며 그 가시성을 조직한 힘에 대해서 추측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손을 넘어 그것을 가능하게 한 흐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축경론》의 조각 작품들에서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세한 요철로 일정치 않게 거칠고, 기포가 빠져나간 듯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표면의 질감이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해변 가에서 들고나는 파도를 맞으며 마모된, 온갖 미세한 바다생물의 집이자 무덤이 되어 그들의 사체와 잔해가 켜켜이 쌓이고 굳은 바위의 표면 같다. 그건 자연스레 시간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주어진 공간이라면, 모든 것은 움직인다. 심지어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끊임없는 유동성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변한다. 물질은 그것이 놓인 공간 안에서 교차된 모든 흐름들에 의해 결정되고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물질은 언제나 어떤 공간의 시간에 대한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고, 그 이미지는 힘의 작용의 축적이자 잔여이다.

《축경론》이 따르는 생성의 원리 또한 이와 같은 이미지론과 공명한다. ‘축경(縮景)’을 곧이 풀이하자면 ‘경관을 줄인다’ 정도일 것이다. 경관이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의 구성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가? 축경은 주로 광대한 자연 전체를 수석, 분재, 분경 등의 형식을 통해 그 원리를 담고자 한 동양의 고전적인 예술 장르 중 하나를 일컫는다. 가시적인 세계의 규모를 줄여 가늠할 수 있는 크기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수석의 경우 그 축소의 방식이 독특한데, 여타의 축경이 상징화를 통해 압축을 수행한다면 수석은 하나의 작은 ‘돌’이라는 사물이 세계 전체의 복잡성 자체를 가진 것으로 여김으로써 축소에 당위를 부여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에 작용한 유동성의 총합과 하나의 돌에 관여한 그것의 총합은 같다. 이는 부분의 열림을 통해 전체를 생성하는 방법으로서, 닫힌 체계로서의 전체와 이에 대한 재현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물질에 각인된 흔적은 그 물질에 관여한 흐름의 기억이며 그 물질을 좌대 위에 올려두는 것은 그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일이다. 그렇게 사물은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물론 이것은 성공할 수 없이 시도만을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즉, 그것은 질문의 형식이고 불가능성에서 시작하는 대화와 사유이지 미학화 될 수 없고 양식화될 수 없는,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랜 전통의 수석이 관습화된 미적 양식으로서 엄격한 취향과 규범에 고착된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축경론》은 거기서부터 벗어나 조각을 경유함으로써 질문의 급진성을 복구한다. 나는 거기서 매끈한 세계에 대한 의심을 묻는, 물질 사이의 화학 작용이 만드는 소음을 듣는다.

뒤집힌 조각


《축경론》의 조각은 뒤집힌 조각이다. 〈Extructed Mountain〉(2020)을 비롯한 대다수의 작업은 아이소핑크에 구멍을 뚫고 시멘트, 조색제 등을 섞은 에폭시 용액을 거기에 부어 굳혀 낸 후 아세톤으로 아이소핑크를 녹여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에폭시와 아이소핑크가 접촉하면 화학 작용으로 열이 발생하는데, 이때 밖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의 변화가 안에서 일어난다. 통제할 수 없고 명령할 수 없이 그저 가늠하고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거푸집에 주물을 넣어 형태를 만드는 것과는 반대의 방식이다. 아이소핑크를 제거하고 남은 굳은 에폭시는 다시 위아래를 뒤집어 세워 좌대 위에 올린다. 그렇게 흘러 내렸던 하강의 운동은 다시 수직으로 서서 위를 향하게 된다. 《축경론》 전시장 한켠 벽면에 자리한 작은 조각 〈Reverse City〉(2019) 즉 “뒤집어진 도시”는 뾰족하게 솟은 산의 형상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위에 걸린 〈The Beacon〉(2020)이라는 세로로 긴 한 장의 사진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기에는 불타는 기지국이 있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뚫고 우뚝하게 솟아 오른 전신주와 거기에 매달린 기계 장치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는 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의 유통은 오늘날의 세계를 강하게 결속하는 네트워크, 문명의 표상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서 교환되는 데이터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밀도 높게 압축되고 더욱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나는 한동안 이 이미지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고, 이를 흘러내림과 수직성, 그리고 화학 작용이 만들어 낸 우연적인 노이즈가 전개된 물질의 형태, 질감과 이어 생각하게 되었다.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의 〈흘러내린 아스팔트(Asphalt Rundown)〉(1969)은 조각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탈리아의 한 광산의 높은 언덕에서 아래로, 아래로 쏟아 부은 아스팔트는 그 지형을 따라 흘러내리며 굳었다. 캔버스를 발아래 두고 물감을 위에서 아래로 흩뿌린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 스미스슨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간의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변형하는 힘을, 부정할 수 없는 예술의 조건으로 사유한 스미스슨의 작업은 시간이 물질을 어떻게 조형하는지를 강조하면서 시간의 불가역성 즉 엔트로피를 드러낸다. 그렇게 그에게 있어서 조각은 쇠퇴하고 소멸하는 것들,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 땅으로 녹아내리는 것을 위한 기념비가 되는 것이다.6) 하지만 동시에, 미래가 과거와 포개져 있는 그의 나선형의 운동은 엔트로피를 초월하고자 하는 시도이자 윤리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문법과 언어의 사용을 우리는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스미스슨이 다루는 시간은 문화적인 것을 넘어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연의 섭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언제나 커다란 자연의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그곳에 놓임으로써 인간중심적으로 구축된 문화와 지식을 비판한다. 부여된 질서가 풍화되고 용해되면서 미시적인 힘의 작용들은 점차적으로 가시화된다.

현남의 조각은 이와 같은 역사적 유산에 얽혀 있다. 세계를 조직하는 힘과 그것에 견주고 그것을 해체하는 힘을 동시에 운용하는 긴장이다. 조각을 위반하면서 스스로 조각이 되고자 함으로써 조각의 역사를 긍정하고 서사화한다. 당대의 문화와 이데올로기, 물질 세계의 구성 원칙과 거기에 깊숙이 침투한 정동을 사물화 하려는 점에서는 미니멀리스트적이지만 실재의 복잡도를 가능한 한 회복하고 이를 형식화 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스미스슨적이다. 그런데 현남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이 교차는, (어느 하나가 더 적확하고 가치 있다기보다는)두 조각적 유산의 합성이 필연적으로 요청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한다. 현남은 그의 조각을 풍경으로 조직하기 위한 원리 중 하나로 ‘채굴’이라는 행위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채굴은 “천연 자원부터 비트코인에 이르기까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지면을 파내는 행위”이며 “파내어진 것을 어딘가로 이동하여 다시 쌓아 올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행위는 끊임없이 표면에 구멍을 내고 동시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쌓는다. 양극화는 심화되지만 구멍과 탑은 저마다의 이유로 위태롭다. 파내고 다시 쌓아 올리는 반복의 운동성이 그가 디코딩한 당대의 힘의 체계 중 하나라면, 그것은 ‘뒤집힌 조각’의 필연성을 강변한다. 여기서 에너지의 소모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는 열역학 제 2 법칙의 명제를 떠올려 보자. 운동이 가속되고 열이 높아질수록 현실은 더욱더 질서를 잃어간다. 화학적 반응으로 열을 뿜어내고 그로 인해 재료를 변형시키고 남은 비정형(the formless)의 잔여로서의 현남의 조각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조각에서 생기라곤 없는 버썩 마른 죽은 땅 같은 질감은 곧장 우리의 경험적 현실을 지시한다. 하지만 그것이 당대를 대표하는 표상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오해일 수 있다. 그보다는 바로 그와 같은 그 이미지를 가능하게 한 운동성과 작용의 시퀀스를 내밀하게 추측하기를 요구한다.

정크스페이스에 대한 기념비


렘 콜하스는 「정크스페이스」라는 글의 첫 시작에서 정크스페이스(junk-space)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근대화가 진행된 이후에 남겨진 것,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응고된 것 혹은 근대화의 낙진이다.”7) 사실 이 글은 전체가 정크스페이스를 규정(혹은 상상)하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정확히 그것이 무엇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콜하스는 이 규정들을 통해 근대가 프로그래밍한 인간 문명 전체의 실재와 속성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한다. 정크스페이스는 구체적인 모종의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절차적 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원리, 힘의 작동 방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하여 드문 의미에서 렘 콜하스는 풍경을 바라보며 풍경에서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서 풍경의 가시성을 조직한 힘을 사유하는 동시대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현남이 조각으로서 풍경을 다루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의 눈에 비친 세계가 콜하스가 말하는 정크스페이스에 가까운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서로 다른 주체의 인식과 사유가 한 곳에서 교차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인데, 그들이 같은 풍경을 바라봤다는 사실 보다는 어떤 특정한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그들이 수행한 보기와 쓰기의 실천을 방법으로서 고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1번 트랙과 2번 트랙은 각각 Shell BeachMang-won이다.
2) 즉 구성이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의미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그것은 오직 “순수한 가시성”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포괄적 풍경 개념”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을 보라. 유운성, 흐름과 보임: ‘너머 없는 세계’의 풍경과 에세이 영화, 오큘로 007: 풍경, 미디어버스, 2018, 31~32쪽.
3) 사토 겐지는 풍경을 “공간에 새겨진 텍스트”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사이의 역동성에 대해 “독서”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풍경이 “인간의 실천의 흔적에 의해 짜인, 인간 실천을 포용하는 거대한 한권의 책”이라고 규정한다. 사토 겐지 지음, 정인선 옮김, 『풍경의 생산, 풍경의 해방』, 현실문화, 2020, 7~8쪽.
4) 페터 한트케가 생트빅투아르 산 앞에서 떠올린 풍경화에 관한 두 예시의 대비는 여전히 유효하다. “17세기에 황금시대를 맞은 네덜란드 왕국은 ‘세속풍경화’라는 회화 장르를 육성했는데, 거기에는 시선이 무한하게 빨려 들어가도록 만드는 효과가 중요했다. 이 목적을 위해 왕국의 많은 화가들은 배경 중앙에 허공을 나는 새를 그려넣는 기법을 활용했다.(“그리고 단 한 마리 새도 그의 풍경을 구원해주지는 않았다”라고 보르헤스는 어느 산문에 썼다.)” 페터 한트케 지음, 배수아 옮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아트북스, 2020, 45~46쪽.
5) 여기서 내가 현남의 조각을 ‘쓰기’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 풍경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풍경은 언제나 텍스트인 이미지이다.
6) 이러한 맥락에서, 로버트 스미스슨에게 당시 등장하던 “대리석이나 화강암 같은 자연의 재료가 아니라 플라스틱, 크롬, 인공 빛 등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미래” 같은 미니멀리즘 조각은 “미래를 잊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기존의 시간 개념과 구조에 반대하는 “새로운 기념비”였다. Robert Smithson, “Enthropy and the New Monuments,” in Robert Smithson: The Collected Writings, edited by Jack Flam(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7) 렘 콜하스 지음, 임경규 옮김, 정크스페이스, 정크스페이스 / 미래도시, 문학과지성사, 202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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