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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장년 성지순례기는 잘못됐다.


2021년 작성된 초고를 2022년 교열하여 게시
이미지: 좌) 애니메이션 やはり俺の青春ラブコメはまちがっている。 스틸 컷(일부는 포토샵으로 인물 제거) / 우) 2020년 2월 치바에서 촬영

성지순례는 풍경을 수집해야 하는 사물로 둔갑시킨다. 그곳에 어떤 스펙타클한 기념비나 역사적인 명소가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편의점, 학교, 쇼핑몰, 공원 벤치, 난간에 새겨진 낙서마저 물신의 대상이 되며, 오히려 그것이 사소하고 하찮을수록 순례자들에게 선사되는 영험의 강도는 증폭된다. 상점가를 샅샅이 뒤지며 한정판 굿즈를 손에 넣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순례는 그것이 수행되는 동안의 모든 감각과 경험을 상품으로 제공한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테마파크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풍경을 매개로 한 애틋한 만남 혹은 소름 끼치는 스토킹이다. 바다를 건너 처음 밟는 땅에 펼쳐져 있는 것은 구글 맵 위에 빽빽이 찍힌 채 공유되는 예측 가능한 체험과 감동이다. 미지의 장소에 숨어있는 익숙하고 다정한 장면들이 마치 예언처럼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성지에서 순례자의 신체는 카메라가 되고, 셔터를 눌러 게걸스레 주워 담는 것들은 원전을 지루하게 반복할 뿐이다. 순례자들이 찍어내는 수천 장의 풍경이 그렇듯이 그들의 경험 역시 형틀에 넣어 찍어낸 것 마냥 판박이다. 모두가 동일한 장소로 향하고 동일한 각도로 보고 동일한 기억을 떠올린다. 때때로 작품과 순례의 시차로 인해 균열이 발생하기도 하나, 이는 다음 행선지로의 이동과 함께 금세 봉합된다. 하지만 이 풍경에는 분명한 유통기한이 있기에, 변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수집을 시작할 것을 권한다. 청춘과 성장의 서사는 오직 작품 속에서만 가능하다. 소비와 관음만이 허락된 순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고증이 얼마나 철저히 이루어졌는지의 여부이며, 이러한 도착(倒錯) 속에서 이미지는 어떠한 비판적인 힘도 갖지 못한다. 여정을 마치고 수집물을 정리하며, 순례자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개의 풍경을 나란히 늘어놓는다. 메아리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고분고분 뒤따른다. 이 둘의 관계에는 일말의 대립이나 적대도 없기에, 그 사이에선 어떠한 변증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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