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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미쿠


2021년 작성된 초고를 2022년 교열하여 게시
이미지: 2019년 1월 상하이에서 촬영

중국 상하이의 황푸취(黃浦區)에 있는 상해문묘(上海文廟)에 가면 문묘 담장을 경계로 두 개의 이질적인 시퀀스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몽타주를 볼 수 있다. 1267년, 원대(元代)에 지어진 이 문묘는 오랜 기간 동안 공자를 모시는 사원이자 학자를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존재해왔다. 이곳은 지난 700여 년간 몇 차례의 이동 끝에 1855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는데, 태평천국 운동과 문화대혁명 때 크게 손실되기도 했으나 보수를 거쳐 1999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입장권을 끊고 문묘의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기석과 고목들이 놓인 뜰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타난다. 우뚝 솟은 3층짜리 괴성각(魁星阁) 방향으로 난 이 길을 따라가면, 검은 기와를 떠받치고 있는 백색 토벽과 붉은 목조로 이루어진 사당 건물을 삼면에 두른 아담한 연못을 볼 수 있다. 연못의 안쪽에는 바위들을 쌓아 만든 작은 돌섬 위로 거대한 영벽석(靈璧石) 하나가 서 있고, 짙은 녹색 빛을 띤 수면은 주변의 풍경을 거울처럼 담고 있다.

대승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유학서(儒學署) 등 문묘 내의 여러 사당과 학당 내부에는 서예, 도자, 조각 등 다양한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묘의 중앙 가장 안쪽으로는 존경각(尊經閣)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도서관으로 이용되었던 이곳에는 유학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이 남긴 오래된 서적들을 볼 수 있다. 이 고서들은 문묘 내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그러하듯 간단한 설명이 들어간 캡션과 함께 유리진열장 안에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특별히 고서나 동양철학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은 이들에게도 여전히 흥미로운 볼거리가 남아있는데, 건물을 나오면 펼쳐진 사각의 넓은 마당에 놓인 돌들이 바로 그것이다. 마당 중앙에는 석재로 된 좌대에 또 하나의 육중한 영벽석이 누워있고, 담벼락 안쪽 벽면을 따라 늘어선 붉은 목재 탁상 위로는 수십여 점의 기석들이 놓여있다. 가지각색의 형태와 빛깔을 띤 이 돌들은 진기하고 신비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살스러운 인상을 준다. 과거 동양의 문화권에서 이러한 기석을 “현자의 돌”이라고 여겼던 점을 떠올리며 그 공간을 거닐다 보면, 마치 오래전에 살았던 학자와 현인의 유령들에 둘러싸여 구경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앞서 글머리에서 언급한 “기이한 몽타주”는 문묘를 다 돌아보고 이곳을 나서는 순간 발생한다. 남쪽의 영성문(棂星門)을 지나 입장권을 끊었던 출입구를 돌아 나오면 바로 앞에 펼쳐진 길가에는 낮은 건물의 상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은 “상하이의 아키하바라”라는 별명을 가진 중국 최대의 서브컬처 상점가 ‘문묘로’(文庙路)이다.

비록 본고장인 아키하바라에 비하자면 소박한 규모라고 볼 수 있겠지만, 거리를 따라 빽빽이 밀집한 작고 낡은 상하이 구도심의 건물들 안팎으로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과 관련된 온갖 오타쿠 굿즈들이 즐비한 광경은 꽤나 인상적이다. 실제로 피규어와 프라모델이 가득 찬 유리진열대에 에워싸인 가게 내부의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 보면, 일본의 작은 피규어 샵에 방문한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느낌을 받는다.

멀리서 이 거리를 보고 있으면 상하이 특유의 우중충한 하늘 아래, 잿빛의 건물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광채가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투명한 쇼윈도의 조명이 비추는 미소녀들의 파스텔 톤 머리카락과 건담의 원색적인 장갑은 바로 그 빛의 입자를 이룬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붙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진화한 각각의 쇼윈도는 오타쿠 샵 디스플레이 특유의 화려한 밀도감을 뽐내며, 주변의 풍경과 분리된 채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오래된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가의 대기를 메우는 형형색색의 빛깔은 문묘 안에 감도는 은은한 고색(古色)과 대비된다. 육중함과 경박함, 고요함과 난잡함, 빛바램과 선명함이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각각의 장소에는 ‘수집물’이라는 동일한 미명하에 유리벽 안과 선반 위에 말 없이 자리 잡은 사물들이 서로 다른 운명 속에서 세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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