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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에 대한 소고


2020년 작성된 초고를 2022년 교열하여 게시
이미지: 2019년 ~ 2022년 고봉산 인근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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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이었던 1998년 이사를 온 뒤, 대학 시절 2년간의 자취생활을 제외하면 나는 평생을 일산이라는 지역에서 살아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주고받던 한 가지 시답지 않은 퀴즈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산’이라는 지명에 관한 문제였다. 퀴즈는 질문자가 ‘일산’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면 질문을 받은 쪽은 곧바로 ‘하나의 산’이라고 대답한다. ‘한 일’에 ‘메 산’으로 이루어진 ‘一山’이라는 지명에 사용된 한자는 초등학생도 모를 수 없을 만큼 쉽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이를 맞히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상대방이 첫 번째 문제를 맞히면 질문자는 다음으로 그 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묻는다. 이 두 번째 질문이 퀴즈의 펀치 라인인데, 여기서 이 문제를 처음 접한 거의 모든 아이들은 ‘정발산’을 답한다. 그러면 질문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땡, 정답은 고봉산이지롱~”이라고 정답을 말하며 상대를 조롱하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것으로 퀴즈는 끝난다.

이 문제의 정답이 정발산이 아닌 고봉산인 이유는 정발산의 해발고도는 88m로, 산이 되기 위한 조건에 미달한, 이름만 산일 뿐이지 사실은 산이 아니라 언덕이기 때문이다. 비록 고봉산이 ‘고봉高峰’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고도 208m밖에 되지 않는 시시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대에서 산이라고 부를만한 유일한 크기의 것임은 틀림없다. 실제로 일산이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관리들이 과거 우리말로 ‘한산’이라 불리던 고봉산의 이름을 바꾸어 ‘일산’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는 유래설이 전해 내려오니, 이 퀴즈는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닌 지역의 역사에 관한 교육을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퀴즈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봉산이 아니라 ‘가짜’ 산인 정발산을 대답하는 것일까?

일산은 행정적으로는 동과 서로 구분되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 90년대부터 진행되었던 신도시 개발은 한강 인근부터 백마역-일산역을 지나는 경의선 철길 아래까지, 일산의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신도시 개발의 혜택을 받은 남쪽의 경우 곧게 뻗은 도로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아파트와 쇼핑몰, 공원 등을 비롯해 각종 행정·문화시설 등이 밀집해있다. 이러한 신시가지의 한가운데 위치한 정발산은 산 자체의 조경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을뿐더러 주위로 학교와 도서관, 고급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또한 정발산은 일산 도심의 중심부에 있는 지하철역 이름으로도 사용되기에, 신도시 내에서 자란 아이들이나 외지인들에게 ‘일산을 대표하는 산’을 묻는다면 익숙하고 친근한 정발산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반면, 고봉산을 기점으로 펼쳐지는 경의선 이북의 풍경은 이곳이 같은 구(區)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급변한다. 지도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곧고 정돈된 격자 형태의 남쪽과는 달리 북쪽의 도로는 마치 식물의 잔뿌리 또는 깨진 유리창의 금 마냥 좁고 구불구불하다. 고봉산 자락에 가면 볼 수 있는 것들은 컨테이너 창고와 비닐하우스, 군부대와 무덤 따위이며, 산봉우리에는 거대한 철탑이 무시무시하게 우뚝 솟아있다. 철탑이 서 있는 산꼭대기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이기에 철책이 둘려 출입이 불가능하고, 산 곳곳에서는 간이 헬기장이나 참호 등 불길한 느낌을 풍기는 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산의 경치가 이렇게 어둡고 삭막하기에 등산을 하기 위한 목적을 제외하면 고봉산과 그 일대의 지역은 신도시 주민들에게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거리가 먼 곳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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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경론> 전시를 준비하던 시기, 2019년 겨울부터 나는 주기적으로 고봉산 주위를 배회하며 그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내가 이 출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수석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형태인 ‘산’을 모티브로 작업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작업을 만들기 위해 재료들을 앞에 두고, 어째서인지 나는 산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야 하는 건지가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산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11월의 겨울밤, 나는 고봉산을 찾아갔다. 그때 하필 고봉산으로 갔던 이유는 첫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팔도명산을 찾아다닐 여유가 없던 나에게 집에서 불과 10~15분 정도 코앞 거리에 있는 그 산이 가장 간편한 선택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봉산이 위치한 동네는 일산이 신도시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으로, 일산에 사는 주민들조차도 등산 목적이 아니라면 그다지 방문할 이유가 없는 곳이다. 공장과 물류창고, 무덤과 폐기물 처리장 등의 기피시설이 모여 있는 인적이 드문 이 지역은, 인생의 대부분을 일산에서 살아온 나에게 역시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가본 이후 거의 20년 만에 찾게 곳이었다. 이날 고봉산을 향해 가는 도중에 나는 속으로 그곳에 펼쳐져 있을 것이 이미 내가 알고 있을 우울하고 무기력한 폐허의 모습일 뿐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산자락에 도착하여 내가 실제로 마주하게 된 것은 어떤 괴상한 활기와 생명력을 지닌 미지의 광경이었다.

서울의 위성도시의 외곽이라는 점에서 변두리의 변두리라고 볼 수 있는 이곳의 풍경이 주는 인상은 지방도시나 시골 마을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지방색이나 한적함 같은 것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도시로부터 흘러들어오거나 도시를 향해 빠져나가는 과정 중에 내팽개쳐지며 자리를 잡은, 무성히 자란 식물들에 엉겨 붙은 온갖 폐기물들은 마치 조류에 의해 형성된 흔적 같았다. 자연물과 인공물이 구분 없이 뒤죽박죽 얽히고 설키며 생성한 이 무책임한 콜라주는 한편으론 거칠고 불규칙한 노이즈 음악을 연상케 했는데, 인기척이 전혀 없는 밤의 산자락은 버려진 사물들이 내는 목소리를 더욱 증폭시켰다. 모든 것이 유해하고 위태로워 보였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솔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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