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의 폐허
2020년 작성된 초고를 2022년 교열하여 게시
유튜브에 공개된 <LOTTE WORLD TOWER 기술영상>의 도입부에서는 잠실에 세워진 롯데월드타워를 “하나의 도시와도 맞먹는 거대한 수직 도시”라는 표현으로 수식한다. ‘스카이런’ 또는 ‘수직마라톤대회’라 불리는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가 열리기도 했던 롯데월드타워는 세계에서 손꼽는 초고층 건물임에는 분명하나, 이를 비롯해 오늘날 그 어떤 건축물도 정말로 하나의 도시에 준할 만큼 거대진 않다. 하지만 당장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압도적인 규모의 수직 도시-건축물의 이미지를 우리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상과학 작품이 그리는 미래상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수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을 고르자면 일본의 SF 만화가 니헤이 츠토무(弐瓶 勉, 1971-)의 대표작 <BLAME!>(1998-2003)에 관해 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수였던 부친 밑에서 자라 학창 시절 건축을 공부하고 만화가가 되기 이전까지 몇 년간 건설업계에 종사한 이력을 지닌 니헤이의 만화는 그로테스크한 도시 디자인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유명한데, 그는 <BLAME!> 이외에도 <시도니아의 기사>, <인형의 나라> 등 자신의 작품에서 매번 국가 규모의 초대형 우주선, 끝없이 펼쳐진 지하 세계와 같은 거대하고 인공적인 공간을 무대로 등장시킨다.
<BLAME!>은 수많은 포스트모던 작품에서 등장하는, 황무지를 정처 없이 방랑하는 <매드 맥스>류의 로드 무비 내러티브를 취하지만, 그 방향을 유도하는 공간이 수평의 황야가 아닌 수직의 폐허라는 점은 꽤나 흥미롭다.1) 작품의 무대가 되는 “구조체”는 수만 층이 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광대한 건축물이다. 과거, “넷 단말 유전자”를 가진 특권층들에 의해 관리되었던 이 공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그들이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통제력을 상실하며 폭주한다. 인간의 손을 벗어난 구조체는 외부의 자원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고, 정신 나간 건설 로봇들에 의해 무한히 증축되며, 그곳의 거주자 중 어느 누구도 그 끝을 알지 못한다.2) 이 폐허는 인공적으로 설계된 첨단 기계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부패하는 유기체의 내장, 그 중간의 무언가처럼 묘사된다.
이러한 수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을 고르자면 일본의 SF 만화가 니헤이 츠토무(弐瓶 勉, 1971-)의 대표작 <BLAME!>(1998-2003)에 관해 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수였던 부친 밑에서 자라 학창 시절 건축을 공부하고 만화가가 되기 이전까지 몇 년간 건설업계에 종사한 이력을 지닌 니헤이의 만화는 그로테스크한 도시 디자인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유명한데, 그는 <BLAME!> 이외에도 <시도니아의 기사>, <인형의 나라> 등 자신의 작품에서 매번 국가 규모의 초대형 우주선, 끝없이 펼쳐진 지하 세계와 같은 거대하고 인공적인 공간을 무대로 등장시킨다.
<BLAME!>은 수많은 포스트모던 작품에서 등장하는, 황무지를 정처 없이 방랑하는 <매드 맥스>류의 로드 무비 내러티브를 취하지만, 그 방향을 유도하는 공간이 수평의 황야가 아닌 수직의 폐허라는 점은 꽤나 흥미롭다.1) 작품의 무대가 되는 “구조체”는 수만 층이 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광대한 건축물이다. 과거, “넷 단말 유전자”를 가진 특권층들에 의해 관리되었던 이 공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그들이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통제력을 상실하며 폭주한다. 인간의 손을 벗어난 구조체는 외부의 자원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고, 정신 나간 건설 로봇들에 의해 무한히 증축되며, 그곳의 거주자 중 어느 누구도 그 끝을 알지 못한다.2) 이 폐허는 인공적으로 설계된 첨단 기계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부패하는 유기체의 내장, 그 중간의 무언가처럼 묘사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주인공 키리이는 끊임없이 구조물의 층계를 오르내리지만, 밑바닥과 꼭대기라는 위상의 차이를 통해 상승과 하강의 서사를 발생시키는 수직 공간에 대한 보편적인 감각이 <BLAME!>의 무대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작품의 큰 줄거리는 키리이가 구조체를 다시금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넷 단말 유전자를 소유한 인간을 찾아 나서는 것이지만, 구조체의 압도적인 규모와 불가해한 설계는
이야기가 전개되며 등장하는 공간의 흐름을 연속적으로 이어보고, 이를 통해 총체적인 공간의 구조와 서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거인 같은 건설기계들은 자동화된 구축과 해체를 반복하며 매순간 구조체의 내부 구조와 지형을 변형시키는데, 거주자들의 안위 따윈 염두에 없는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드는 이 무시무시한 미로는 주인공이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임무와 전투를 부조리하고 단편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분열시키는데, <BLAME!>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토로하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장과 장, 컷과 컷 사이 인과의 불투명함, 스토리텔링의 불친절함은 이 같은 공간 구조에 의한 분열이 작품의 표현 형식에까지 영향을 끼친 결과로 보인다.
결국 이 수직의 폐허는 주인공을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과 위협이 도사리는 현재 속에 무한히 제자리걸음을 하도록 몰아넣으며,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끊임없이 층계를 오르는 그의 모습은 낙오 직전 무거워진 걸음으로 간신히 계단을 밟는 스카이런 참가자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1) 사실 <BLAME!>에는 이 구조체를 외부 시점에서 묘사한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에, 이것이 실제로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층’을 오르내리는 것으로 전개되는 작품 서사가 이 공간을 막연히 수직적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뿐이다.
2) 설정집에서 작가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구조체는 진즉에 지구를 집어삼키고 목성 궤도 넘어까지 자라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큰 줄거리는 키리이가 구조체를 다시금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넷 단말 유전자를 소유한 인간을 찾아 나서는 것이지만, 구조체의 압도적인 규모와 불가해한 설계는
이야기가 전개되며 등장하는 공간의 흐름을 연속적으로 이어보고, 이를 통해 총체적인 공간의 구조와 서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거인 같은 건설기계들은 자동화된 구축과 해체를 반복하며 매순간 구조체의 내부 구조와 지형을 변형시키는데, 거주자들의 안위 따윈 염두에 없는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드는 이 무시무시한 미로는 주인공이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임무와 전투를 부조리하고 단편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분열시키는데, <BLAME!>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토로하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장과 장, 컷과 컷 사이 인과의 불투명함, 스토리텔링의 불친절함은 이 같은 공간 구조에 의한 분열이 작품의 표현 형식에까지 영향을 끼친 결과로 보인다.
결국 이 수직의 폐허는 주인공을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과 위협이 도사리는 현재 속에 무한히 제자리걸음을 하도록 몰아넣으며,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끊임없이 층계를 오르는 그의 모습은 낙오 직전 무거워진 걸음으로 간신히 계단을 밟는 스카이런 참가자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1) 사실 <BLAME!>에는 이 구조체를 외부 시점에서 묘사한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에, 이것이 실제로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층’을 오르내리는 것으로 전개되는 작품 서사가 이 공간을 막연히 수직적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뿐이다.
2) 설정집에서 작가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구조체는 진즉에 지구를 집어삼키고 목성 궤도 넘어까지 자라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