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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들의 집


윤원화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관하여』, 미디어버스, 2022, p.121~128


시각적 소비의 대상이자 부의 원천으로 훼손되는 몸들이 온전히 그들만의 집을 짓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2018년 가을 시청각에서 열린 문경의와 현남의 전시 《희지스 하우스》는 이미지의 매개체로 통용되는 사물들의 꿈을 현실화한 것처럼 보였다. 작가들은 회화와 조각을 일상 사물과 위계 없이 뒤섞으면서 한옥을 개조한 전시 공간을 누군가의 집처럼 연출했다. 노희지라는 전시 기획자가 한시적으로 자택을 개방하고 개인 소장품을 공개했다는 설정이 있었지만, 이곳에 모인 물건들을 규제하는 상위의 구성 원리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다는 사물들이 빈집을 점거하고 자기와 비슷한 친구들을 잔뜩 불러모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 형상을 구현하지만 그래서 더 손상된 몸처럼 보이는 껍질 같은 것들이 책상과 선반을 점령하고, 유튜브 플레이리스트가 반복 재생되는 컴퓨터 스크린을 응시하고, 침대에서 만화책을 보고, 전시를 감상하고, 때로는 스스로 전시물이 되어 다른 관람자를 맞이했다. 이들은 《희지스 하우스》라는 허구를 떠받치는 집합적이고 연극적인 몸체를 이루며 독특한 활기를 발산했다.

이곳이 정말로 누구의 집이냐고 묻는다면, 시각 매체들이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의인화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미술의 집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능적으로 말해서, 이곳은 문경의의 회화 작업과 현남의 조각 작업이 전시되는 미술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미술사의 영웅적 주인공처럼 이미지의 그릇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의 내적 본질에 골몰하기보다 이미지의 매개자로서 자신들을 둘러싼 외적 조건을 드러내길 원했다. 그것이 장난감과 인형, 꽃병, 미술 작품의 복제본, 그림 속에 재현된 물건들, 가짜 음식, 미술 이론서와 공포 영화, 회화와 조각이 한자리에 모여야 했던 이유다. 오늘날 시각 세계를 조형하는 힘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몸에 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몸에서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잘 보이지 않는 외부의 힘에 의해 각인되거나 부각된다. 하나의 몸이 이미지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힘으로 짓눌리고 절단되고 뜯겨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평면성은 이미지의 형식적 속성이기 전에 몸에 가해진 물리적 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몸은 폭력적인 평면화를 통해 매력적인 가상을 소환하고 또 다른 몸을 끌어당길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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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이미지의 그릇이 되지 못하는 살의 불만족은 라텍스를 이용한 현남의 조각 작업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현남은 가시성이 실현되는 표층에 아무런 신비도 없음을 확인하려는 듯이 라텍스를 얇게 굳힌 부드러운 판을 뭉치고 접어 비정형의 덩어리를 제작했다. 라텍스는 식물의 끈끈한 유액, 특히 고무나무 수액이나 그와 유사한 고분자 유화액을 총칭하는데, 소나무 진액의 물성을 모방한 레진 계열의 합성수지가 유리처럼 단단하게 경화되는 것과 달리 라텍스는 굳은 후에도 살결처럼 말랑한 질감을 유지한다. 그것은 이미지를 떠받치기에 너무 무른 재료다. 라텍스 뭉치들은 그림의 표면처럼 이미지를 수용하거나 조각적 사물 같은 자세를 취하려고 애쓰지만 어떻게 해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현남은 이 꾸깃꾸깃한 껍질들의 굴곡진 부분에서 어떤 표정을 발견하고 그것을 부각하여 일종의 두상을 제작했다. 몸통이 잘려나갔거나 애초에 머리와 몸이 분절되지 않은 듯한 주름진 얼굴들이 전시장 여기저기 놓였다. 이들은 때로 안경을 쓰고 서로의 흐릿함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무리 짓는 행동은 서로의 부족한 가시성을 보충하는 동시에 강조하는 듯했다.
현남의 〈성 바르톨로메오〉는 이렇게 흐늘흐늘한 살껍질들의 기념비로 조성된 것이다. 폴리스티렌에 가짜 암석 무늬를 입힌 제단 아래쪽에는 작은 봉제 인형의 털가죽과 칼 한 자루가 봉헌되어 있고, 그 위에는 황백색의 라텍스 껍질을 뭉친 커다란 덩어리가 포장도 뜯지 않은 만화책 몇 권을 소중한 듯이 품고 있다. 그것은 동물의 생가죽 같기도 하고, 소화할 수 없는 것을 삼키려 하는 연체동물, 또는 그저 모양을 잡는 데 실패한 초대형 팬케이크 같기도 하다. 바르톨로메오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혹형을 당했다고 하여 칼과 가죽으로 상징되었고 그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도축업자와 가죽 세공사의 수호성인으로 숭상되었다. 성인은 고통의 원천인 육신을 내려놓고 천상의 순수한 영혼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가 남긴 껍질은 지상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한 무더기의 가죽으로 남아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이어간다. 바르톨로메오의 가죽에는 성인의 신성한 이미지가 담겨 있지 않다. 거기에는 그의 영혼도 없고 몸도 없고, 굳이 말하자면 그런 것들을 강제로 추방한 폭력의 흔적으로서 하나의 공백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백에 무언가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온다.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제작하면서 천상의 바르톨로메오가 든 육신의 텅 빈 껍질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전해진다. 일그러진 표정의 껍질은 폭력적인 분리가 수행되고 각인되는 장소로서 예술가의 초상이 된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자에게 남는 것은 축 늘어진 껍질밖에 없다. 〈동굴〉은 이 껍질들이 뭉쳐지면서 말 그대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보여준다. 이빨 사이에는 조그만 인간들이 끼어 있고, 피부는 녹아내리는 이미지로 뒤덮였으며, 눈과 코가 있어야 할 자리는 주저앉아 시커먼 동굴이 되었다. 이렇게 훼손되고 훼손하는 몸은 정말로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것은 뭔가 나쁜 것에 홀렸나, 아니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일그러진 이미지, 얄팍한 살, 복구 불가능한 구멍으로 이루어진 손상된 몸들은 달콤한 과자의 집, 한없이 늘어날 수 있는 위장, 부서지지 않는 이빨을 꿈꾼다. 또한 그것들은 회화와 조각을 꿈꾼다. 더할 나위 없는 시각성의 몸체가 되어 온전히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특별한 사물들만 오를 수 있는 천국이 있어서 그곳에서 평온하게 세계를 관조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있다. 미술은 또 다른 과자의 집이 아닐까? 불완전한 몸들은 허기에 사로잡힌 채 생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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