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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 위의 좌대 : 수석, 회로, 악몽


현시원
축경론 도록에 수록, 2020


1.
현남의 전시 제목이기도 한 ‘축경론’은 세계를 보는 하나의 도구이자 전시 전체를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축경(縮景, miniascape)’이라는 개념을 경유한다.”1) “채굴의 방식과 수직성, 축소된 것의 특권”(작가 노트)으로서 작가가 구현한 작업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물리적 공간(공간형, 쉬프트)에서 쌍을 이루거나 불화하며 관객의 시점에 노출되어 있다. 미니어처 사이즈인 그것들은 스스로, 혹은 작가에 의해 돌이거나 산이거나 조각난 망국의 풍경인 양 등장한다. 그의 이번 작업은 태연하게 이론과 기술의 오해를 즐긴다.

작가에 따르면 “수석(壽石), 분재(盆栽), 석가산(石假山)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축경’은 자연의 풍경을 축소하는 기예를 의미한다.” 실제로 보고 경험한 산이나 돌덩어리 자체보다 그것의 축적과 축척, 전시와 보호의 관습에 대해 지켜보고자 하는 작가는 그의 오랜 관심이기도 했던 노이즈 음악과 회로 결합과 잡음의 기술과 구축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기예를 의미한다’는 ‘축경’에 대한 독립적 정의와 관습, 지금도 존재하는 오해도 오독도 불가능한 돌과 산 덩어리를 현남은 불러낸다.

기예라는 말 때문일까, 나는 이 글을 완성하기 직전까지 ‘(이)론’이 아닌 ‘(기)술’이라는 의미에서 그의 제목을 ‘축경술’로 다르게 부르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극장 관객의 손에 든 망원경에서부터 스마트폰의 액정화면까지, 오페라, 무용, 미술 등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보다 잘 현시하기 위한 장치들로서 그것은 이론이 아닌 것으로 내겐 보였다. 그것은 쓰다 사용이 퇴화되면 가져다 버려야 하는 편이성을 갖는 술책으로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남의 《축경론》은 적합한 기술과 업데이트의 원리가 아닌 개별 조각들이 좌대 위에 올라가 있는 형상, 이러한 각자의 형상들이 모인 하나의 형국인 전시장을 ‘이론’으로 부른다.

2.
끝없이 반복되어 정착 불가능한 ‘업데이트’가 아닌 잠시 불가능한 수립의 방식을 부착해보기로 하자. 그는 화학으로서의 만들기, 전기회로가 일으키는 잡음이나 오차와 같은 기술들로 온전히 파악 불가능한 ‘전체’가 갖는 미지(未知)의 과정을 경험한다. 그래서 엉성한 접시 위에 올라간 조야한 수석이나, 몇 백 년도 더 오래 전에 풍화 작용을 거쳐 시간은 버리고 자기 몸뚱이만 남겨놓은 돌을 볼 때에 오는 감각이 되고야 만다. 혹은 터져 버린다. 좌대 위의 좌대랄까, 작가의 ‘네거티브 과정을 거친 만들기’를 통해 ‘작은 파편’이 아닌 ‘작은 전체’로 눈앞에 나타난다. 원본은 없는 주변 부산물들의 집적으로 가득한 현실을 보는 작가는 A와 B의 특정 대상을 반전시키는 ‘이론’을 세움으로서 자신의 반복 행위를 지속하고 매개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서 ‘풍경을 물질화한다’는 메니페스토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질문과 가설이다. 그것은 이렇게 제시된다. “의식적으로 재현을 의도한 주체가 없음에도 조그만 돌덩어리 하나가 산수(山水)와 같은 풍경을 닮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기후조건 및 퇴적과 풍화 등의 자연현상이 하나의 지리적 형태를 결정짓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풍경 내부의 자연물의 형태를 조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남의 전시 《축경론》은 도구이자 전시 전체인 동시에 전시의 앞과 뒤를 아우른다. 작가가 ‘돌 탐방’과 ‘풍경 기록’이라는 두 개의 폴더 안에 담아 놓은 조각 제작 ‘이전’의 경험 자체이기도 하다. 돌과 산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탐방’과 ‘풍경’으로 “채굴”한 현남의 ‘축경론’은 중국 상해의 문묘에 자리한 괴석들과 항주 영은사에서 모처럼의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검고 울퉁불퉁한 거대한 돌 뭉치들, 일본 교토 분재시장에서 앉아있는 수석에 대한 다량의 사진 이미지들로 남아있다. ‘축경론’ 전은 이러한 탐방의 대상들, 무덤, 산, 돌에 대한 조야한 믿음의 지속을 소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재현’을 화학 반응 속에 투사/투척하는 현남의 명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도구일까? 그것은 그가 직접 몸을 움직이며 경험한 산과 돌을 눈앞으로 이동시키는 ‘발생의 기술’이다. 작가가 정의한 ‘축경론’이라는 개념과 별개로, 전시장에 놓인 좌대와 작업은 큰 것이 작은 것으로 환생한 듯한 효과가 있다. 원본으로서의 자연과 그것을 반전(네거티브) 시키는 형태로 재생산되는 조각이 제시되어 있다.2)

둘째, 전시의 앞과 뒤를 아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시장에 놓인 작업들은 작가의 만들기 과정 자체를 지시하며 등장하고 또 그가 보았던 일산 야산의 사물을 제작해내기도 한다. 전시장의 〈축산(단봉)〉(2020)과 〈축산(쌍봉)〉 (2020)은 원래 하나였던 작업을 둘로 나눈 것이며 〈정수기〉(2020)는 사진으로도 그 가깝다면 가까운 출처를 제시한다. 먼데서 온 수석이 아닌 정수기는 현대적 의미의 애니미즘 혹은 토템일 수 있을까. 〈회전타원체〉(2020)가 풍경의 내용을 끊고 가는 마디의 수직성을 보여준다면, 분홍색은 오래 보기 힘든 인공물/사본의 탁함을 강화한다. 〈뒤집힌 도시〉(2019), 〈구축 현장〉(2020), 〈네거티브 랜드마크〉(2020)가 어떤 도시 풍경 랜드마크의 축소된 전체를 제시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좌대마저 덩어리화된 과정을 주시하는 편이 나는 보다 흥미롭다.

3.
내 눈앞에는 지금 작가 현남이 보내준 ‘제작과정’ Jpeg이 놓여있다. 드로잉도 메모도 아닌 이 종이를 작품 과정의 회로랄까, ‘작업 제작도’라고 불러보자. 어떤 재료가 무슨 동작에 의해 최종 결과물로 구현되는지에 대한 과정이 이미지와 텍스트로 전개된다. 아이소핑크 덩어리 분쇄(1)에서 아세톤으로 아이소핑크 부분을 녹여 구멍 속에 경화된 공간만 남김(4)까지 능동태와 수동태의 과정이 오간다. 한 덩어리로 핑크빛 재료를 결합시키고자 하는 것이 작가 현남의 의도라면, 종이에 그려진 시계와 화살표(->)에 의해 얼음과 열이 서로 강약 중간 약을 조정하며 녹아버리는 ‘현상’은 내버려두어야 발생가능한 텀(term)이다. 에폭시, 시멘트, 아이소핑크 등이 물질적 1차 재료라면 현남에게 중요한 것은 (에폭시의) 자발적 발생과 형태의 왜곡이다.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A와 B, 혹은 C/D의 2, 3차 결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은 잡음이 원래 의도를 능가한다. 그의 제작도에 드러난 문장을 읽어보자. 굳는 과정에서 균열, 변색, 기포가 다량으로 발생하고, 팽창 및 수축으로 인한 형태의 왜곡 상황이 일어난다. 좌대 위에 무엇을 올려놓고, 산을 내려오면서 발견한 것들을 무분별 보는 것은 공적 사적 관습과 싸우는 자유다. 기억을 하는 개인과 집단, 돌과 산, 물질적 현전에 대한 선명도는 이렇게 다른 무엇과 대비된다.

“여기서 레코드의 잡음은 가변적인 기억의 선명도를 측정하기 위한 상수로서 사라져가는 기억과 대비를 이루는 물질적인 현전이 된다.”3)



1) 이하 인용된 모든 글은 현남의 작가 노트. 필자는 전시 서문을 제안 받은 후 작가에게 제작 과정에서의 이미지와 작가 노트를 요청했고, 작가는 2020년 3월 경 이를 전달해주었다. 필자에게 제공된 작가 노트는 2018년에서 2020년 경 쓴 것이다.
2) 효과와 발생이 같이 있다. 반전된 듯 시간의 전후 관계가 뒤바뀌어 있다랄까. 작가 노트에서도 현남은 이를 소개하고 있지만 대화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음각이 양각으로 남는다. 녹으면서 생기는 것들이 있다. 그 안에서 엉망진창이 되면서 어떤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치 회로를 고장 내면서 소리를 만드는 방식처럼, 재료나 기법을 변형하고 꼬면서 만들어내는 물리적 화학적 작용이 재밌다.” (대화는 2020년 5월 경 을지로 작업실에서 이뤄졌다.)
3) 필자는 2017년 현남의 '레퍼런스'에 관한 자유 글을 요청하였다. 그는 본인이 선택한 연구 주제로서 '케어테이커(caretaker)'에 관해 꽤 긴 글을 작성했다. 미공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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