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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


안소연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아뜰리에 에르메스) 카탈로그에 수록, 2021

(EN/KR)

신예 조각가 현남의 개인전은 새로운 조형의 의지와 제안이 드물고 그 의미마저 희박해진 현실에서 조각 전통의 끝자락을 다시 들어올리는 듯, 전례 없이 생경한 형태와 컬러로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근대화가 남긴 동시대의 정크스페이스1)를 배회하고 관찰하면서 무질서로부터 모종의 활기를 발견하는 작가는 도시 건축의 표피와 피하조직에 해당하는 재료인 폴리스티렌과 시멘트, 에폭시로 도시 풍경의 현재와 미래를 구성한다.

조각의 유산을 해체하면서도 새롭게 조직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남의 작품들은 일종의 ‘채굴’ 행위를 통해 새로운 자산, 혹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신기루 같은 무지개처럼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디지털 세상이 실제로는 창살 없는 감옥인 현실에서 이제는 고물로 취급받는 물질을 다루어 세계를 재구성해 보려는 의지이다. 대물림된 역사에서부터 소비적인 서브 컬처에 이르기까지 위계 없이 뒤섞인 자원과 정보를 활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작가는 ‘감상’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에 대해 의심하고 불가능한 탈주를 꿈꾼다.

‘굴’을 파는 행위는 물리적으로 아이소핑크라 불리는 값싼 폴리스티렌 재료에 다양한 도구로 구멍을 뚫고 그리로 나머지 재료를 흘려 넣어 굳힌 뒤, 최종적으로 폴리스티렌을 녹여 없애는 작업을 말한다. 이는 보이지 않아 예측이 힘든 내부 공간을 결과물로 삼는 네거티브 캐스팅이자 재료들 사이의 화학반응이 야기할 무작위적인 변형마저도 수용하는 행위이다. 아래로 흘러내리며 완성된 형태를 뒤집어 전시하게 되는 작품은 상승하는 수직의 조형물이자 첨탑, 고층의 도시 풍경으로 확장된다.

말레비치가 제작한 일련의 건축 모형 연작 중 아키텍톤 고타 Architekton Gota(1923)를 반영하는 아토그 Atog(2021)는 뒤집힌 알파벳의 순서가 암시하는 것처럼 반복하면서도 대립하는 방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다룬다. 작품은 당대 서유럽 모더니즘 건축의 수평성과 대비되는 수직 건축의 가능성을 다루며 미래의 건축으로 제시된 ‘고타’의 입방체를 차용하면서도 러시아 절대주의자가 꿈꾸었던 매끈한 순백의 추상과는 거리가 먼 어두운 미래도시의 풍경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포가 빠져나가면서 남긴 거친 표면과 형광에 가까운 컬러의 조각은 SF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수직의 폐허로 전환된다.

‘채굴’은 물리적인 조각의 방법론 못지않게 현실을 배회하면서 조각적으로 보이는 수직 구조물을 발견하고 탐사하는 개념적인 행위를 포괄한다. 작가는 도시 곳곳은 물론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지만 좀처럼 주목되지 않는 기지국을 현대적인 첨탑으로 간주하면서 무선통신 서비스라는 첨단의 기능에 어울리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조형성을 관찰한다. 기지국 감상은 현대적인 삶을 지탱하면서도 위협하는 존재인 보이지 않는 인터넷의 물리적인 몸체를 인식하고 감시의 시선을 되돌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조각을 통해 풍경을 다루려는 작가 현남의 의지는 좌대 위에 놓인 작은 사물로도 세계의 외연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적 상상력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재현에 의해서가 아니라 발견에 의해, 수석이나 분재, 석가산의 문화에서 비롯된 ‘축경 (縮景)’의 개념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풍화작용을 겪은 자연의 파편으로 거대한 풍경을 구성하듯, 재료의 화학적인 결합이 만들어 낸 뒤엉킨 사물은 폐허가 된 미래의 풍경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전기회로와 물질이 만들어 내는 노이즈 사운드 밴드활동을 해 온 작가에게 물질과 브리콜라주, 우연과 새로운 생성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자 예술적인 방법론이 된다.



1) 건축과 도시, 풍경과 지질학을 다루는 현남의 조각들은 현대적인 삶의 공간에 대해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 렘 콜하스의 글 정크스페이스 (2002)를 여러모로 유추하게 한다. 물리적인 공간을 지칭하기 보다는 동시대의 삶의 조건을 진단함으로써 현대 문명론에 가까운 이 글에서 렘 콜하스는 이음매도 없이 매끈한 내부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켜 마침내 건축이 곧 도시가 되는 오늘날의 공간을 주목한 바 있다. 기준층이나 절대적인 수평과 투명성 따위가 사라진 현대의 공간에서는 지속적인 변화와 멈출 수 없는 유동성만이 진리이기에, 각기 다른 ‘시대’ 들이 중첩된 모핑의 고고학을 축적해 간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현장인 이곳에서 점진적인 확대는 발전이 아닌 엔트로피로 귀결되며 균열과 쇠퇴는 보고되지 않는 지진처럼 다가온다. 인류가 그곳에서 탈주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렘 콜하스, 프레데릭 제임슨, 정크스페이스 / 미래 도시 임경규 옮김 , 문학과 지성사, 2020, pp.9–53 참조

현남 작가와의 인터뷰


안소연     전시에서 보여지는 조형물들은 어떤 기시감들을 잊게 만들 정도의 특이한 디테일과 생경한 컬러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새로운 조형행위가 회의적이기도 하고 드물기도 한 현실에서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하구요. 형상을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현남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세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실체를 알기 어렵게 느껴집니다. 가장 사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일조차도 온갖 복잡한 추상적 원리들에 의해 매개되어 나타나기에, 하나의 현상이 어떠한 인과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때로는 그 시도조차 불가능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손으로 물질을 다루어 어떠한 형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 하나이며, 여기에는 조각이라는 관습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각에는 여러 가지 재료와 도구, 번거로운 공정과 절차가 요구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무게를 갖고 실재하는 공간에서 거추장스럽게 부피를 차지하며,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조각을 다른 그 어떤 행위보다도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으로 만듭니다.
      저는 이러한 조각의 솔직함을 통해 제 앞에 놓인 세계를 재구성해보며, 그것의 본질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안     대부분의 작품이 프리 스탠딩이나 좌대 위에 놓인 오브제로,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조각의 전시방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을 다루려는 대담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어요. 조각 오브제가 풍경을 담아낼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조각을 통해 풍경을 다룬다는 생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수석(壽石)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했습니다. 2017년경 우연한 계기로 인터넷을 통해 해외의 누군가가 수집한 수석의 이미지들을 접했는데, 그것이 무척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이후 수석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한 가지 흥미롭게 다가온 것이 ‘축경(縮景)’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축경은 수석을 비롯하여 분재, 석가산 등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광대한 자연의 경관을 축소해 작은 뜰이나 방 안에서 감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풍경을 축소한다는 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방식이 디오라마에서처럼 실재하는 풍경을 고스란히 작은 크기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자연에서 발견한 사물 그 자체를 작은 풍경으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에도 조그만 돌덩어리 하나가 거대한 산수를 닮는 이유는 해당 사물이 자신을 담고 있는 풍경과 동일한 구성 성분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일한 퇴적, 침식, 풍화와 같은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저 물질의 원리를 충실히 따랐을 뿐임에도, 작은 파편이 자신의 내부에 그가 속한 세계 전체를 새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저는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후 저는 제가 다루는 재료의 물성과 제가 속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조형 원리로 삼아 작업하며, 이러한 사물과 풍경,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조각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자 했습니다.


안     재료들을 작가의 의지대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서로 간의 화학반응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할 겁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는지 알려주세요.

      작업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주된 재료는 폴리스티렌(스티로폼과 XPS보드)과 에폭시입니다. 이는 값싸고 편리하다는 장점 때문에 저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동시대의 조각가들이 사용하는 재료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조각에서 사용되는 것 이상으로 오늘날 건축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보편적인 물질이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조각에서 이 재료들을 다루는 것과 같이 폴리스티렌을 깎거나 잘라 그 표면에 이러저러한 재료를 바르거나 붙이고, 에폭시를 캐스팅하여 어떠한 원형을 본뜨는 방식으로 작업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형태를 만드는 일에는 금방 흥미를 잃었습니다. 이 재료들은 탄생한 지 100년도 되지 않는 새로운 물질인데 이를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깎고, 붙이고, 캐스팅해서는 대리석을 스티로폼으로, 청동을 에폭시로 대체할 뿐, 진정으로 그 물질만이 가지고 있는 형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회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후 재료들의 특성에 대해 조사하고 이러저러한 실험을 거치며 특정한 조건에서 이것들이 녹거나 과열되고, 뒤틀리거나 균열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조각의 기법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실패로 간주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여타의 부수 재료나 절차가 동원되지만, 저에겐 오히려 그러한 반응이 이 재료들이 가진 고유한 표현으로 보였으며, 저는 이러한 표현에 기초하여 조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안     조각에 컬러를 적용하는 사례도 흔하지 않은 일인데, 선택한 컬러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런 감성은 어디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색채의 선택에 엄격한 규범을 두지는 않지만, 주로 (제가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브 스트리밍을 비롯하여 인터넷을 매개로 오늘날 문화산업에서 쉴 새 없이 찍어내는 이미지들로부터 가져옵니다. 일각에선 이러한 문화를 ‘서브컬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오늘날 서브컬처를 서브컬처로 규정하는 총체문화라는 대립항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이 문화는 어정쩡한 위치에 놓여 그저 지루하고 무의미한 업데이트와 기계적인 팽창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색채는 과잉 생산과 경쟁 속에서 빠르고 효과적으로 소비되기 위해 인스턴트하고,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유쾌하고 유아적이거나 또는 유해하고 자극적인 인상을 주도록 만들어집니다.
      작업에 들어가며 처음에는 선택된 대상이 지닌 색채에 최대한 근접하게 조색하지만, 이후 과정에서 벌어지는 재료들의 화학적인 반응으로 인하여 결과물에서는 변색이 일어나고 표면에 얼룩 찌꺼기들이 달라붙게 됩니다. 그러한 표면은 저에게 마치 지금 제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들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빛바래거나 부패해버린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한편 색채를 어디서 가져오는지에 앞서, 제가 작업에서 색채를 사용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그것이 작업이 생산되는 과정과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폴리스티렌 덩어리에 굴을 파고, 여기에 에폭시를 비롯하여 이러저러한 재료들을 부어 넣는 일종의 네거티브 캐스팅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작업의 시작에서부터 최종적으로 폴리스티렌 덩어리를 녹여 결과물을 끄집어내기까지 저는 결과물의 형태를 대략적으로 예측할 뿐 그것이 만들어져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파놓은 굴에 재료들을 타설하는 과정은 절차와 용도에 따라 대개 몇 단계로 나눠서 진행됩니다. 각 단계에서 부어넣는 재료에 서로 다른 색을 첨가할 경우 최종적인 결과물이 나왔을 때, (지층의 단면을 보는 것과 같이) 하나의 작업 안에 서로 다른 색채를 띤 부분들이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반응하여 만들어졌는지를 사후적으로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      ‘굴’을 파는 행위는 실제 물리적으로 발생하는 조각의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개념적으로 미술의 역사나 특정 지역의 문화 또는 자연 현상, 더 나아가 동시대의 사회와 대중문화의 레퍼런스들까지 채집하고 활용하는 행위로 보여집니다. 작가는 ‘채굴’의 개념을 동시대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에 하나인 경제행위와 연계해서 고려했던 것인지요?

     채굴을 조형의 방법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동굴’이라는 작업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동굴’은 2018년 ‘시청각’이라는 공간에서 열렸던 전시에 참여하며 만들었던 작업으로, 당시 제작한 작업들은 대부분 라텍스 고무를 접고 뭉치며 나온 덩어리의 표면에 인쇄된 이미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전시를 준비하던 시기에 국내에서는 비트코인에 관한 이슈가 한참 화제가 되던 중이었습니다. 뉴스 기사를 비롯해 SNS와 온갖 커뮤니티가 비트코인의 가치 폭등과 폭락에 관한 소식으로 소란스러웠기에, 암호화폐에 관해 아는 바가 없던 저도 뒤늦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비트코인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살펴보며 가상화폐를 얻기 위한 연산 행위를 ‘채굴’이라고 표현한다는 사실과 채굴에 사용되는 도구로 컴퓨터의 이미지 처리 장치인 그래픽 카드를 사용한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저는 전시를 위한 마지막 작업을 만들던 중이었는데, 가상화폐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접하며 곧바로 이를 모티브 삼아 작업을 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굴 형태의 라텍스 덩어리를 만들고 내부 표면에는 그래픽 카드가 빼곡히 늘어선 채굴장의 풍경을, 외부에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매장에 진열된 상품과 쓰레기 매립지의 이미지들을 붙이고, 덩어리의 한 부분에 치아 모형을 박아 넣은 뒤 이빨 사이에 아주 작은 사람 모형을 끼워 마치 동굴이 인간을 집어삼키는 듯한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시청각 전시 이후 현재 사용하는 재료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며, 이런저런 실험을 통해 발견한 그 재료들의 물성을 어떠한 방법을 통해 조직하고 결과물로 이끌어야 할지 고민하던 시점에서 문득 작업실 선반 구석에 놓아둔 동굴 작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업을 보며 그것을 만들던 당시 벌어진 여러 즉흥적인 선택과 행위들이 준 즐거움이 기억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이에 제가 놓친 것은 없었는지, 최초에 그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았습니다.
      이때 ‘채굴’이라는 단어의 이미지, 어두컴컴한 채굴장 창고의 풍경, 닭장 같은 선반을 가득 메운 채 과열되며 돌아가는 채굴기들과 암호화폐라는 정체불명의 수수께끼 같은 개념 등이 주는 감각들이 다시 한번 떠올랐고, 이러한 감각을 보다 직접적으로 형태화하기 위해서는 동굴의 모양을 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제 스스로 굴을 파보아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채굴을 통해 조각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면이 있습니다. 자유롭게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없고, 항상 뒤집어서 생각해야 하며,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상상해야 합니다. 굴을 깊이 파낼수록 조각은 높아지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면 꼭 어딘가가 터져 새거나 부러져버립니다.


안      ‘핑크 비즈니스’라는 밴드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음악을 했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은 조형작업에 어떤 방식으로 투영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핑크 비즈니스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활동했던 노이즈 밴드입니다. 저는 10대 시절부터 기타를 치며 대학에 들어온 후 이런저런 밴드에서 연주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락 음악에 기반한 연주가 점점 지겹게 느껴졌고 음악 자체보다는 전자기타라는 악기와 그것의 소리를 내기 위한 이펙터, 앰프와 같은 장치를 가지고 다양한 소리를 만드는 것에 관한 관심이 더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알고 지내던 민성식이라는 전자음악가와 함께 핑크 비즈니스를 만들며, 당시 제가 가지고 있던 소리에 대한 관심을 음악의 형태로 만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핑크 비즈니스에서는 정해진 악보나 진행에 기반한 것이 아닌 한 명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다른 한 명이 그것에 어울리는 소리를 만들고, 그러다 서로 소리를 비틀기도, 쌓기도, 지우기도 하며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자기타는 화음과 멜로디를 연주하기 위한 악기가 아닌 긁고, 울리고, 흘리고, 일그러뜨리고, 찍어낼 수 있는 물질이 되었고, 저는 더 많은 소리를 얻기 위해서 다양한 장치들이 지닌 물성을 극대화하고 이들의 연결 방식과 구성을 변형하며 새로운 반응들을 탐구했습니다.
      조각을 전공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 역시 전무했던 저는 조각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뒤, 낯선 재료와 절차를 마주할 때마다 과거 노이즈를 만들 때의 태도와 감각을 가지고 문제를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안     작가는 수도권의 변두리 야산을 관찰하기도 하지만 도시 곳곳에 숨겨진, 아니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기지국을 관찰해 왔습니다. 기지국이 흥미를 끈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기지국에 대한 관심은 작년 봄, 뉴스를 통해 기지국 연쇄 방화사건 소식을 접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국내에서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던 시기에 영국에서 SNS를 통해 코로나가 5G 기지국의 전자파를 통해 확산된다는 가짜뉴스가 퍼지며 영국을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기지국을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이는 근거 없는 음모론이 불러일으킨 웃지 못할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저는 이전까지는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기지국이라는 사물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가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풍경들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기지국들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독특한 형태를 한 사물이 도처에 널려있음에도 의식하기 전까지는 놀랄 만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그 뒤로 항상 바깥을 돌아다닐 일이 생기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 속 어디에 기지국이 숨어있는지를 찾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관찰하면 할수록 사이버펑크물에 나올 법한 그로테스크한 생김새가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지형과 기후에 따라 식물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설치된 장소의 인구밀도, 건축 환경, 지역의 용도 등에 따라 상이한 구조와 형태를 취한다는 점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지금 저에게 기지국을 보는 것은 하나의 감상 행위처럼 되어버려, 길을 걷거나 운전을 하는 도중에도 훌륭한 형태의 기지국이 눈에 들어오면 그 근처로 걸음을 돌려 구경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안     기지국 감상법이 있다면 어떤 것을 권하고 싶은지요?

      비록 기지국을 주워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지만, 밖으로 나가 멋진 기지국을 찾아다니는 저의 취미가 수석인들이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귀한 돌을 탐석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수석에 입문할 때 처음 배우는 것 중 하나가 명석名石을 평가하는 기준에 관한 것인데, 저 역시 다양한 기지국들을 마주하며 언젠가부터 이것을 평가하는 나름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리한 기지국의 조형미는 ‘첨尖’, ‘밀密’, ‘괴怪’, ‘경景’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를 순서대로 간략히 설명하자면, 첫째로 훌륭한 기지국은 고딕 첨탑과 같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어야 하며, 둘째로 안테나와 분전함은 빽빽하고 주렁주렁 달려 있을수록 좋습니다. 셋째로, 빼어난 기지국은 무언가 괴이한 인상을 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괴이함은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있거나, 쌍둥이처럼 붙어있거나, 어설픈 인공 나뭇가지와 같은 요소들로 위장된 경우 등에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기지국은 언제나 야외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놓인 풍경과의 관계가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경우, 생김새와 상관없이 명기지국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안     기지국 탐사를 하면서 사진 기록물을 남기기도 합니다. 기지국과 교회 십자가를 같은 공간에서 함께 관찰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기지국과 십자가는 한국에서 하늘과 맞닿아있는 사물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수가 워낙 많기에 둘이 함께 놓여 있는 경우 역시 드물지 않은데, 교회 근처에 우뚝 선 기지국 기둥이나 교회 지붕에 얹어진 안테나를 볼 때 저는 고딕 건축물의 뾰족한 첨탑과 가고일 조각 등이 연상되곤 합니다.
      이 둘의 조합은 조형적으로도 인상적이지만, 둘 모두 문명을 전파하는 도구라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먼 옛날에 교회의 존재는 그것이 위치한 지역 공동체의 질서와 문화를 관리하고 문명과 야만을 구분 짓는 권력이었다면,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기술이 우리의 삶 전반을 지배하는 오늘날에 기지국은 과거 십자가가 지닌 것과 비견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     기지국은 편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감시와 추적의 장비로서 음모론의 대상이 될 법합니다. 보이지 않는 무선 통신의 외피를 물리적으로 가시화하려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기지국이 지닌 실질적인 위협은 전자파가 코로나를 퍼트린다든지 암을 유발한다든지의 문제가 아닌 추적과 감시의 기능에 있을 것입니다. LTE, 5G와 같은 무선통신 서비스가 제공되는 범위 내에서 누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기지국을 통해 기록되고 이에 대한 수집과 사용은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2011년 희망버스, 2013년 철도파업 당시 수사기관에 의해 노조 활동가 및 언론사 기자 등에 대한 위치추적 및 감청이 이루어진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으며, 작년 이태원 클럽에서 발생한 코로나 집단감염 사태에서 역시 기지국에 기록된 정보를 통한 방문자 추적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디서든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어디서든 감시와 지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지국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사우론의 눈이 번뜩이는 바랏두르 탑처럼 모두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 저는 기지국을 비롯해 여기에 연결되어 거대한 네트워크의 체계를 구성하는 여러 신체 기관들을 감상할 수 있는 형태로 제작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감상을 통해 최소한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만큼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닌 보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안     새로운 작품 시리즈 ‘아토그 ATOG’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아토그(Atog)’라는 단어는 말레비치의 조각 ‘아키텍톤 Arkhitekton’ 연작 중 1923년 제작된 <Arkhitekton Gota>에서 ‘고타 Gota’라는 단어의 알파벳을 거꾸로 뒤집은 것입니다. 말레비치는 「회화와 건축에 관한 문제」라는 에세이에서 “알파 Alpha”는 수평적, “고타 Gota”는 수직적 건물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이 기본적인 단위들의 조합을 통해 당대 절대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건축적 형태와 서유럽의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을 분석합니다.
      저는 축경 작업을 진행하며, 미술사에서 조각을 통해 풍경을 구축한 선례를 찾는 과정에서 말레비치의 이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이 작업은 하나의 단일한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수많은 건물들이 모여 형성된 거대한 도시의 풍경으로 다가왔는데, 좌대 위에 올라간 작은 조각이 감상자에게 강제하는 광활한 시점과 거리감은 작은 사물을 통해 전체—풍경을 보게 하는 축경의 감각과 유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근대화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던 당시 소련의 현실을 고려하였을 때 말레비치의 조각에 내재된 그 거대한 스케일은 단순히 공간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모종의 유토피아적 시간성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이후 저는 제 작업에서 축경을 만들던 방식으로 말레비치의 ‘고타’를 제작해보고자 했습니다. 제가 기존에 사용하던 재료인 폴리스티렌과 에폭시, 시멘트가 오늘날 건축의 표피와 피하조직에 해당하는 재료라는 사실은 이 작업을 시도하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말레비치가 만든 <고타>가 석고로 제작된 수십 개의 입방체를 쌓아 만들어진 것이라면, 저의 작업에서는 폴리스티렌을 잘라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쌓아 올리되 양적인(positive) 덩어리가 아닌 텅 빈 구덩이를 만들고, 이 구덩이를 네거티브 캐스팅으로 떠냅니다. 보이드가 뒤집혀 덩어리가 되고, 제작 과정의 방향과 결과물의 방향이 또한 거꾸로 뒤집힌다는 점 때문에 저는 작품의 제목이 역시 거꾸로 뒤집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이유에서 ‘Gota’를 뒤집어 ‘Atog’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안     ‘아토그’나 ‘축경’이 탑의 형식으로 구현된 도시 또는 자연 풍경을 조감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 작업 ‘위성사진 Satellite View’은 정반대의 시선, 즉 조밀한 광물의 생성을 근접해서 관찰하는 시각일 것입니다. 비스무트 재료에 대한 관심과 사진작업으로 드러낸 이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비스무트 결정체는 반짝이는 기하학적인 도시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축경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 물질에 관심을 갖게 된 더 큰 이유는 그것을 만드는 방식에 있습니다. 이 결정체는 주괴 형태의 금속을 냄비 같은 용기에 넣고 완전히 녹인 뒤 천천히 응고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되는데, 보이지 않는 네거티브 공간에서 스스로 형태를 만든다는 점이 제가 굴을 파고 재료를 부어 넣어 형태를 만드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작업실에서 결정체를 만들고 난 뒤, 종종 그 색채와 디테일에 정신을 빼앗겨 한참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곤 합니다. 작은 도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관찰하다보면, 이러한 행위가 마치 인공위성이 렌즈를 통해 지표면을 촬영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비록 결정의 물리적인 크기는 아주 작지만 제가 그 속에서 본 풍경은 무척 큰 것이었고, 크기에 대한 이 시각적 경험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매체가 사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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