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 Lag Dig
흔히들 현남의 작업에 대해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조각을 떠올리실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작가는 수석, 분재, 석가산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는 ‘축경’의 개념을 방법론 삼아 조각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다루고 있죠. 때로는 자연의 형상을, 혹은 익숙한 조형물을 닮은 이 낯선 조각들은 저마다 작가가 염두에 둔 현실의 단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축경론 기획 노트」(2020)
에서 작가는 축경이 광대한 자연의 경치를 작은 뜰이나 방 안에서 감상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미적인 욕망으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축경의 개념을 방법론으로 풍경을 다루고자 하는 이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동굴
〈동굴〉(2018)은 축경 이전에 조각을 다루기로 한 작가의 초기작입니다. 이 조각은 ‘채굴’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한 작업으로, 이후 채굴은 그의 조형 방법론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잊으셨겠지만 채굴은 원래 땅을 파고 땅속에 묻혀 있는 광물 따위를 캐내는 행위를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캐다’라는 의미의 채(採)와 ‘파다’라는 의미의 굴(掘)이 합쳐진 이 단어는, 광산을 의미하는 ‘mine’에서 파생된 ‘mining’의 번역어이기도 합니다. 예상할 수 있듯, 이제 어느 검색 엔진에든 ‘채굴’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암호화폐와 관련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동굴〉은 안팎을 구분할 수 있는데, 내부에 종횡으로 줄 세운 그래픽 카드를 부려 먹는 코인 채굴장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채굴하는 내부와 달리 외부의 이미지들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진열장의 상품, 매립지의 쓰레기와 같이 각기 다른 위상을 가진 대상이 한 표면에 엉켜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고무 유액을 접고 뭉치는 작업 과정을 상상해 보면 그 경계는 일시적이고, 오히려 내부와 외부마저 언제든 섞일 수 있습니다. 곳곳에 자리 잡은 디오라마 인간 모형과 그것을 삼키려 드는 구강 모형을 보면, 이 조각은 동굴인 동시에 인간의 얼굴이며 그(들)의 욕망을 원근과 각도를 달리하며 바라본 풍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오래 전 중국 여행을 다녀온 작가가 디지털 화폐로 손쉽게 결제하는 시스템에 몹시 놀랐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간편 결제 시스템이 자리 잡지 않았던 때라, 길거리 노점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쉽게 결제하는 중국의 이야기가 미래처럼 느껴졌어요. 다시 〈동굴〉로 돌아와 추측해 보면, 작가는 어느 날부터 비트코인으로 떠들썩한 세상에 피곤함을 느꼈나 봅니다. 스마트폰을 하나씩 쥐고 있지만, 지갑을 꺼내 카드로 결제해야 하는 나라에서 디지털 화폐의 탈중앙화나 블록체인 기술의 혁신에 대해 누가 관심이나 있었나요. 투자할 돈이 마땅찮아도 일하지 않고 크게 한 방 노려볼 심산으로 너도나도 코인에 관심을 가졌던 거니까요.
〈동굴〉은 작가가 바라본 생산과 소비의 시공간이 뒤얽혀 가는 풍경입니다. 이 풍경은 충실한 재현일지언정, 작가의 시점을 초과할 수 없죠. 작가가 생각하는 동굴은 더 수수께끼 같은 곳이었고, 채굴 역시 그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굴을 파기로 했다”는 작가의 말이 네거티브 캐스팅 기법으로 조각을 시작했다는 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겠지요. 물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재료를 흘려 넣고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화학 작용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채굴’은 중요한 형식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볼 수 있는 한정된 세계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까마득한 현실 일부를 더듬으며 거푸집 삼아보는 것이 더욱 중요한 다짐이었을 테지요.
발견하는 풍경
수석은 축경을 다루는 분야 중에서도 독특한 취미입니다. 최근에는 물로 깎아낸 돌도 취급한다지만, 원칙적으로는 인공적으로 가공된 것을 제외하고 자연석만을 진정한 수석으로 여기죠. 돌은 크기가 작은 암석이고, 암석은 광물로 이루어집니다. 광물은 천연물이고, 원자 배열이 규칙적인 결정질이고요. 그러니까 내부 구조에도 규칙이 있는 암석은 같은 종류라면 같은 구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수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문외한의 눈에야 다 같은 돌멩이지만, 내부 구조가 외부로 아름답게 드러나는 돌이 있는 법입니다. 애호가들은 그 조건을 투(透)·준(皴)·수(秀)·수(瘦)로 나누고, 탐석행을 통해 자연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찾아 좌대에 앉히죠. 그런데 축경이 자연의 풍경을 축소하는 ‘기예’라면, 그 기예는 누구의 것인가요.
어떠한 풍경을 축소해 본다는 건, 그에 비할 바 없이 작은 나를 인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현남은 작업실에서 다양한 조각을 만들어 내는 한편, 밖으로 나가 압축된 풍경을 탐방하고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개인전 《축경론》(2020) 한 해 전, 작가는 중국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상해문묘’와 ‘문묘로’의 대비를 다룬 짧은 글 「공자와 미쿠」(2021)를 통해 축경의 관점이 싹트던 때의 그를 상상해 봅시다. 중국 전통의 정원과 기석에 대한 관심으로 원나라 시기인 1291년에 지어진 공자를 모시는 ‘상해문묘’를 찾은 작가는, 사원을 둘러본 후 담벼락 너머 “상하이의 아키하바라”라고 불리는 일본 서브컬쳐 상점가 ‘문묘로’를 마주합니다. 중국의 전통과 일본의 현대 사이에 서서 그가 보았을 지정학적 풍경은, 그야말로 축경인 동시에 그 속의 자신을 마주하는 계기 아니었을까요.
동굴
〈동굴〉(2018)은 축경 이전에 조각을 다루기로 한 작가의 초기작입니다. 이 조각은 ‘채굴’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한 작업으로, 이후 채굴은 그의 조형 방법론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잊으셨겠지만 채굴은 원래 땅을 파고 땅속에 묻혀 있는 광물 따위를 캐내는 행위를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캐다’라는 의미의 채(採)와 ‘파다’라는 의미의 굴(掘)이 합쳐진 이 단어는, 광산을 의미하는 ‘mine’에서 파생된 ‘mining’의 번역어이기도 합니다. 예상할 수 있듯, 이제 어느 검색 엔진에든 ‘채굴’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암호화폐와 관련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동굴〉은 안팎을 구분할 수 있는데, 내부에 종횡으로 줄 세운 그래픽 카드를 부려 먹는 코인 채굴장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채굴하는 내부와 달리 외부의 이미지들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진열장의 상품, 매립지의 쓰레기와 같이 각기 다른 위상을 가진 대상이 한 표면에 엉켜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고무 유액을 접고 뭉치는 작업 과정을 상상해 보면 그 경계는 일시적이고, 오히려 내부와 외부마저 언제든 섞일 수 있습니다. 곳곳에 자리 잡은 디오라마 인간 모형과 그것을 삼키려 드는 구강 모형을 보면, 이 조각은 동굴인 동시에 인간의 얼굴이며 그(들)의 욕망을 원근과 각도를 달리하며 바라본 풍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오래 전 중국 여행을 다녀온 작가가 디지털 화폐로 손쉽게 결제하는 시스템에 몹시 놀랐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간편 결제 시스템이 자리 잡지 않았던 때라, 길거리 노점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쉽게 결제하는 중국의 이야기가 미래처럼 느껴졌어요. 다시 〈동굴〉로 돌아와 추측해 보면, 작가는 어느 날부터 비트코인으로 떠들썩한 세상에 피곤함을 느꼈나 봅니다. 스마트폰을 하나씩 쥐고 있지만, 지갑을 꺼내 카드로 결제해야 하는 나라에서 디지털 화폐의 탈중앙화나 블록체인 기술의 혁신에 대해 누가 관심이나 있었나요. 투자할 돈이 마땅찮아도 일하지 않고 크게 한 방 노려볼 심산으로 너도나도 코인에 관심을 가졌던 거니까요.
〈동굴〉은 작가가 바라본 생산과 소비의 시공간이 뒤얽혀 가는 풍경입니다. 이 풍경은 충실한 재현일지언정, 작가의 시점을 초과할 수 없죠. 작가가 생각하는 동굴은 더 수수께끼 같은 곳이었고, 채굴 역시 그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굴을 파기로 했다”는 작가의 말이 네거티브 캐스팅 기법으로 조각을 시작했다는 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겠지요. 물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재료를 흘려 넣고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화학 작용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채굴’은 중요한 형식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볼 수 있는 한정된 세계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까마득한 현실 일부를 더듬으며 거푸집 삼아보는 것이 더욱 중요한 다짐이었을 테지요.
발견하는 풍경
수석은 축경을 다루는 분야 중에서도 독특한 취미입니다. 최근에는 물로 깎아낸 돌도 취급한다지만, 원칙적으로는 인공적으로 가공된 것을 제외하고 자연석만을 진정한 수석으로 여기죠. 돌은 크기가 작은 암석이고, 암석은 광물로 이루어집니다. 광물은 천연물이고, 원자 배열이 규칙적인 결정질이고요. 그러니까 내부 구조에도 규칙이 있는 암석은 같은 종류라면 같은 구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수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문외한의 눈에야 다 같은 돌멩이지만, 내부 구조가 외부로 아름답게 드러나는 돌이 있는 법입니다. 애호가들은 그 조건을 투(透)·준(皴)·수(秀)·수(瘦)로 나누고, 탐석행을 통해 자연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찾아 좌대에 앉히죠. 그런데 축경이 자연의 풍경을 축소하는 ‘기예’라면, 그 기예는 누구의 것인가요.
어떠한 풍경을 축소해 본다는 건, 그에 비할 바 없이 작은 나를 인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현남은 작업실에서 다양한 조각을 만들어 내는 한편, 밖으로 나가 압축된 풍경을 탐방하고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개인전 《축경론》(2020) 한 해 전, 작가는 중국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상해문묘’와 ‘문묘로’의 대비를 다룬 짧은 글 「공자와 미쿠」(2021)를 통해 축경의 관점이 싹트던 때의 그를 상상해 봅시다. 중국 전통의 정원과 기석에 대한 관심으로 원나라 시기인 1291년에 지어진 공자를 모시는 ‘상해문묘’를 찾은 작가는, 사원을 둘러본 후 담벼락 너머 “상하이의 아키하바라”라고 불리는 일본 서브컬쳐 상점가 ‘문묘로’를 마주합니다. 중국의 전통과 일본의 현대 사이에 서서 그가 보았을 지정학적 풍경은, 그야말로 축경인 동시에 그 속의 자신을 마주하는 계기 아니었을까요.
《역시 내 장년 성지순례기는 잘못됐다》(2021)는 아마 많은 분이 보지 못했을 겁니다. 《축경론》과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2021) 사이에 열린 이 작은 개인전은, 애니메이션 『역시 내 청춘 러브 코미디는 잘못됐다.』의 배경이 된 일본 치바를 찾아가는 ‘성지순례’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작품 속 장면과 실제 장소 이미지를 나란히 찍어 올리는 ‘무대탐방’ 문화에 흥미를 느낀 작가는 그것을 고스란히 반복합니다. 전시와 동명의 작가 노트에는 개인적 감상마저 레디메이드화 되는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 아래에 묘한 쓸쓸함이 비치는데, 이 상반된 시선은 작가가 전시장에 나란히 놓은 두 종류의 풍경들이 자아내는 어긋남과 닮아 있었죠.
현남이 축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에는 다른 시간의 충돌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마치 수석의 모양에 수많은 시간이 쌓아온 지층의 변화가 담긴 것처럼요. 재밌게도 「나의 기지국 감상기」(2020)에서는 고색 짙은 문체에서부터 그러한 시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수석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참조한 것이 분명한 이 글의 화자는 앞선 두 탐방 사례와 달리 여유가 있습니다. 전자가 ‘요즘 것’들이 못마땅한 꼬장꼬장한 선비라면, 후자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변화를 음미한달까. 수석의 4대 요소를 모방해 만든 첨(尖)·밀(密)·괴(怪)·경(景)이라는 조건도, 현대 인류에게 자연환경과도 같은 정보통신 기술과 그에 말미암은 문제를 조형으로 읽어내려는 시도이자, 자신이 발견한 어긋난 시간을 즐기는 방식입니다. 게다가 전파를 통해 물리적 제한을 비약적으로 줄이는 기지국은 그 자체로 시간을 뒤트는 장치 아닌가요.
Fugue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왜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낸다고 믿는지, 어떤 사람은 자신의 귀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지.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해도 어떤 종류의 망상은 늘 통신 기술과 연관해 발생합니다. ‘감시 공포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과의 일부분을 설명할 뿐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가설은 이런 겁니다. 인간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상대의 수는 제한적이고, 미디어는 그것을 증폭시킨다. 취약한 상태의 신체는 그 상황에서 과부하를 일으킨다. 인간은 확장된 관계를 통해 변화를 겪는다.
전자기과민성증후군(Electromagnetic Hypersensitivity, EHS)이라는 증상을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전자기기에서 나오는 전자파로 인한 두통, 두근거림, 피로 등의 통증을 호소하지만, 과학적으로는 그 인과 관계가 증명된바 없습니다. 우리 생활 속 각종 무선 기기는 소량의 무선 주파수(Radio Frequency, RF) 방사선을 내보내지만, 일반적으로 스마트폰에 피폭됐다고 얘기하지 않죠. EHS 증상자들은 이러한 낮은 전파에도 통증을 느끼고, 다양한 장비를 활용해 자신을 보호합니다. 전자파 차단 스티커처럼 여러분도 한 번쯤 봤을 제품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각자 다른 증상만큼 다양한 장비를 직접 제작합니다. 재료나 제작 방식에 대한 정보는 커뮤니티를 통해 주고 받겠지만 그 양상은 각기 다릅니다. 가장 잘 알려진 알루미늄 호일만 해도 활용 방식이 제각각이고, 은이나 구리, 나무 등을 사용한다면 그 다양성은 더 커지겠지요.
기지국의 불길한 조형성에 매료된 현남이 EHS에 관심을 두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의 경치를 특별히 담은 모양의 돌이 존재한다면, 세계의 풍경을 담은 사람도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과민한 사람은 어떤 세계의 병폐를 압축적으로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무선으로 연결되어 거리와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인가요. 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어 갈 때, 그 시간을 채 따라잡지 못한 누군가는 자신이 겪는 불합리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EHS 증상자들이 전자파를 회피하기 위해 만드는 다양한 형태의 장비는 유효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느끼는 규명할 수 없는 사실을 형상화하니까요.
두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돌을 두고, 세계를 지구본처럼 돌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정상은 아닐 겁니다. 앞서 말한 가설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개인이 세계를 파악하려고 하면 과부하에 걸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번 전시를 통해 현남이 동굴에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폐광이죠. 채굴을 위해 인간이 판 굴이고, 이제 더는 파낼 것이 없는. 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RF 탐지기의 신호음으로 기록한다는 건 일종의 노이즈로 만드는 네거티브 캐스팅이겠네요. 그런데 그게 기지국에서 폐광까지 이르는 거라면 일종의 시간 여행이기도 한 걸까요. 문득 재료에 화학적 반응과 물리적 변화를 유도해 조각을 만드는 과정도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압축하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현남은 왜 동굴로 들어갔나요?
현남이 축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에는 다른 시간의 충돌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마치 수석의 모양에 수많은 시간이 쌓아온 지층의 변화가 담긴 것처럼요. 재밌게도 「나의 기지국 감상기」(2020)에서는 고색 짙은 문체에서부터 그러한 시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수석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참조한 것이 분명한 이 글의 화자는 앞선 두 탐방 사례와 달리 여유가 있습니다. 전자가 ‘요즘 것’들이 못마땅한 꼬장꼬장한 선비라면, 후자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변화를 음미한달까. 수석의 4대 요소를 모방해 만든 첨(尖)·밀(密)·괴(怪)·경(景)이라는 조건도, 현대 인류에게 자연환경과도 같은 정보통신 기술과 그에 말미암은 문제를 조형으로 읽어내려는 시도이자, 자신이 발견한 어긋난 시간을 즐기는 방식입니다. 게다가 전파를 통해 물리적 제한을 비약적으로 줄이는 기지국은 그 자체로 시간을 뒤트는 장치 아닌가요.
Fugue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왜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낸다고 믿는지, 어떤 사람은 자신의 귀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지.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해도 어떤 종류의 망상은 늘 통신 기술과 연관해 발생합니다. ‘감시 공포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과의 일부분을 설명할 뿐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가설은 이런 겁니다. 인간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상대의 수는 제한적이고, 미디어는 그것을 증폭시킨다. 취약한 상태의 신체는 그 상황에서 과부하를 일으킨다. 인간은 확장된 관계를 통해 변화를 겪는다.
전자기과민성증후군(Electromagnetic Hypersensitivity, EHS)이라는 증상을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전자기기에서 나오는 전자파로 인한 두통, 두근거림, 피로 등의 통증을 호소하지만, 과학적으로는 그 인과 관계가 증명된바 없습니다. 우리 생활 속 각종 무선 기기는 소량의 무선 주파수(Radio Frequency, RF) 방사선을 내보내지만, 일반적으로 스마트폰에 피폭됐다고 얘기하지 않죠. EHS 증상자들은 이러한 낮은 전파에도 통증을 느끼고, 다양한 장비를 활용해 자신을 보호합니다. 전자파 차단 스티커처럼 여러분도 한 번쯤 봤을 제품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각자 다른 증상만큼 다양한 장비를 직접 제작합니다. 재료나 제작 방식에 대한 정보는 커뮤니티를 통해 주고 받겠지만 그 양상은 각기 다릅니다. 가장 잘 알려진 알루미늄 호일만 해도 활용 방식이 제각각이고, 은이나 구리, 나무 등을 사용한다면 그 다양성은 더 커지겠지요.
기지국의 불길한 조형성에 매료된 현남이 EHS에 관심을 두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의 경치를 특별히 담은 모양의 돌이 존재한다면, 세계의 풍경을 담은 사람도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과민한 사람은 어떤 세계의 병폐를 압축적으로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무선으로 연결되어 거리와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인가요. 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어 갈 때, 그 시간을 채 따라잡지 못한 누군가는 자신이 겪는 불합리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EHS 증상자들이 전자파를 회피하기 위해 만드는 다양한 형태의 장비는 유효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느끼는 규명할 수 없는 사실을 형상화하니까요.
두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돌을 두고, 세계를 지구본처럼 돌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정상은 아닐 겁니다. 앞서 말한 가설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개인이 세계를 파악하려고 하면 과부하에 걸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번 전시를 통해 현남이 동굴에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폐광이죠. 채굴을 위해 인간이 판 굴이고, 이제 더는 파낼 것이 없는. 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RF 탐지기의 신호음으로 기록한다는 건 일종의 노이즈로 만드는 네거티브 캐스팅이겠네요. 그런데 그게 기지국에서 폐광까지 이르는 거라면 일종의 시간 여행이기도 한 걸까요. 문득 재료에 화학적 반응과 물리적 변화를 유도해 조각을 만드는 과정도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압축하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현남은 왜 동굴로 들어갔나요?